러시아 자충수에 에너지 패권 미국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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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영토의 중간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우랄산맥 서쪽 지역은 석유와 천연가스가 풍부하게 매장된 곳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침공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옛 소련이 피폐해진 경제를 회복해 사회주의 강대국이 된 것도 석유와 천연가스 덕분이다.

소련이 1991년 붕괴한 이후 이를 승계한 러시아가 15개 공화국의 독립으로 국력이 크게 약해졌음에도 다시 강대국 반열에 올라선 이유 역시 석유와 천연가스 때문이다. 실제로 러시아는 세계 3위 석유 생산국이자 세계 1위 천연가스 수출국이다.
에너지 인질 삼아 주권 국가 침략한 러시아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21년 기준으로 러시아 국내총생산(GDP)은 1조7107억 달러(약 2069조 원)로 세계 11위이지만 산업 구조는 매우 열악하다. 러시아는 자동차나 휴대전화, 반도체, 선박 등을 수출해 먹고사는 나라가 아니다. 러시아는 석유와 천연가스, 석탄 등 에너지 자원 수출로 국력을 유지해왔다. 벨기에 싱크탱크 브뤼겔에 따르면 에너지 자원은 러시아 GDP의 5분의 1, 재정 수입의 40%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러시아는 에너지 자원을 지렛대 삼아 유럽은 물론, 국제사회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에 국제사회는 그동안 러시아를 셰일오일·가스 최대 생산국인 미국, 석유수출국기구(OPEC) 수장인 사우디아라비아 등과 함께 ‘에너지 패권국’으로 간주했다.

특히 러시아는 에너지를 앞세워 유럽 각국에 ‘힘’을 과시해왔다. 현재 유럽연합(EU)이 천연가스 40%, 석유 25%, 석탄 45%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과거 수차례나 천연가스 공급을 중단해 유럽 각국이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EU는 2050년까지 탄소중립 실현 목표를 세운 만큼 러시아 천연가스를 더욱 많이 수입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대표적으로 유럽 최대 경제대국 독일을 들 수 있다. 모든 원전을 폐쇄할 계획인 독일은 탄소중립을 위해 러시아와 함께 발트해 해저 파이프라인을 통해 천연가스를 공급받는 ‘노르트 스트림2’ 프로젝트를 추진해왔다. 하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독일 정부는 제재 조치로 이 프로젝트의 가동 승인을 보류했다. 만약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지 않았다면 독일은 천연가스 수요의 75%를 노르트 스트림1과 2를 통해 러시아로부터 수입했을 것이다. 러시아는 2012년 완공돼 가동 중인 ‘노르트 스트림1’을 통해 연간 550억㎥의 천연가스를 독일에 공급해왔다. 독일은 현재 러시아로부터 천연가스의 55%, 석유의 40%를 들여오고 있다.

또한 라트비아, 슬로바키아, 핀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등은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100% 의존하고 있다. 폴란드는 80%, 오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는 60%, 이탈리아는 40%가 러시아산 천연가스다. 이런 이유로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국은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름(크림)반도를 강제병합했을 때도 소극적인 제재만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이번에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한 것 역시 유럽 각국이 2014년처럼 제대로 제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러시아의 오판이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자국 안보를 위협하는 가장 중요한 사안으로 간주했다. 이에 유럽 각국은 우크라이나에 각종 무기를 제공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있다. 또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제재 조치에 그 어느 때보다 적극 동참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유럽 각국이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를 대폭 낮추는 정책을 추진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에너지를 인질 삼아 주권 국가까지 침략하는 러시아의 ‘횡포’를 묵인할 경우 자칫하면 자국 안보까지 무너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산 천연가스에서 ‘독립’ 선언한 EU
EU 27개 회원국은 3월 25일 정상회의에서 올해 러시아산 천연가스 의존도를 3분의 2로 줄이고, 2027년까지 완전히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말 그대로 러시아산 천연가스로부터 ‘독립’하겠다는 것이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우리는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했다”며 “더는 러시아의 잔혹한 공격에 도움을 주는 행동을 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EU 정상들은 현재 25% 수준인 천연가스 비축량을 올해 11월까지 80%, 내년까지 90%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로 뜻을 모았다. EU의 이런 계획에 유럽 각국이 합의한 것은 독일이 앞장섰기 때문이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미국 등 에너지 공급처를 다각화하고 현재 건설 중인 액화천연가스(LNG) 터미널을 신속하게 완공하겠다”고 밝혔다. 독일은 2월 2개의 LNG 터미널 신규 건설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EU 회원국들은 LNG 터미널을 보유하고 있지만, 독일에는 아직까지 한 개도 없다. 로베르트 하베크 독일 부총리 겸 경제장관은 3월 20일 카타르 도하를 방문해 셰이크 타밈 빈 하마드 알사니 카타르 군주(에미르)를 만나 장기 LNG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카타르는 LNG 주요 수출국 중 하나로, 지난해 기준 세계 1위 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하베크 부총리는 또 요나스 가르 스퇴레 노르웨이 총리와 회담을 갖고 천연가스 공급 확대에 합의했다. 노르웨이 국영 에너지기업 에퀴노르는 향후 몇 달간 천연가스 생산량을 늘려 올여름에는 유럽에 더 많은 가스를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노르웨이가 생산한 천연가스의 95%는 해저 파이프라인을 통해 독일, 영국, 프랑스, 벨기에 등으로 수출된다. 노르웨이는 올해 안으로 폴란드와 연결되는 가스 파이프라인도 완공할 예정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미국 정부가 EU와 LNG 공급을 대폭 늘리고 에너지 안보를 위해 태스크 포스(TF)까지 만들기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당장 올해 EU에 최소 LNG 150억㎥를 추가 공급하기로 했다. 미국이 EU에 공급한 LNG 양은 지난해 220억㎥였다. EU 집행위원회는 회원국들이 2030년까지 연 500억㎥의 미국산 LNG를 추가로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유럽이 러시아산 화석연료 의존도를 줄이려면 LNG를 포함한 추가적인 가스 공급이 필요하다”며 “미국의 LNG 추가 공급 약속은 현재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을 대체할 수 있는 큰 조치”라고 밝혔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유럽이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를 줄이는 데 적극 협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이 유럽에 천연가스 공급을 대폭 늘린다면 세계 에너지 시장에서 러시아 위상은 급속히 추락할 수도 있다. 세계적인 에너지 전문가 대니얼 예르긴 IHS마킷 부회장은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쓴 기고문을 통해 “러시아는 소련 붕괴 후 20년 이상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자로서 쌓아온 명성을 불과 수주 만에 무너뜨렸다”면서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경제력 원천을 훼손시켰다”고 지적했다.
美 세계 1위 LNG 수출국 등극
미국 LNG업체들은 유럽 각국으로 수출을 대폭 확대하면서 대박을 터뜨리고 있다. 주가 또한 고공행진 중이다. 특히 미국 LNG 터미널에는 유럽행 LNG 운반선이 선적을 기다리며 줄 지어 정박해 있을 정도다. 미국 에너지부는 자국의 모든 LNG업체가 최대 생산량을 수출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미국은 현재 카타르와 호주를 제치고 사상 처음으로 세계 최대 LNG 수출국으로 등극했으며, 생산 능력을 확대할 경우 연말까지 수출을 현 수준보다 20% 늘릴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미국은 앞으로 향후 수년간 세계 1위 LNG 수출국 자리를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이 새로운 천연가스 공급자로서 유럽시장을 장악한 것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푸틴 대통령의 ‘자충수’ 덕분이다. 미국은 그동안 유럽에서 에너지 패권을 놓고 러시아와 경쟁했지만 번번이 물러서야 했다. 미국 LNG는 셰일가스를 LNG로 만들어 운반선을 통해 유럽에 수출해야 해 비용 면에서 러시아산 파이프라인 천연가스(PNG)보다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 정부가 독일과 러시아를 연결하는 노르트 스트림2를 강력하게 반대한 것도 이 때문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전에는 유럽에서 자국산 가스의 시장점유율 확대로 경제적 이익과 함께 유럽에 대한 영향력도 강화해왔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에너지 패권은 미국으로 넘어갔다. 푸틴 대통령이 유럽 국가 등에 천연가스 대금을 러시아 통화인 루블화로 지급할 것을 요구했지만 주요 7개국(G7)이 거부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라고 볼 수 있다. 예르긴 부회장이 “미국이 유럽시장에서 러시아를 제치고 천연가스 주요 공급자로 올라선 것은 글로벌 석유·가스산업에 커다란 전환점”이라고 평가한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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